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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派祖)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

 

선생은 관조(貫祖) 김녕군(金寧君) 휘 시흥(時興)의 八세손이신 증영의정(贈領議政) 휘 관(觀)의 맏아드님으로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忠北沃川君伊院面白池里)에서 출생 하시었다. 초휘(初諱)는 효기(孝起)이셨으나 과거(科擧)에 합격한후에 선생의 장인(丈人) 김효정(金孝貞)의 효(孝)를 피하여 문기(文起)로 개명(改名)하셨으며, 자(字)는 여공(汝恭)이시고, 호는 백촌(白村) 또는 마암(馬巖)이시다.

선생께서는 불과 十여세 때 어머니 옥천육씨(沃川陸氏)께서 돌아가시자 十여리나 되는 그 산소에 매일같이 성묘를 다니셨다. 성품이 악을 미워하셨고, 말씀을 잘 하셨으며, 기우가 굉대하셨다.

세종(世宗) 八년(一四二六)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자 곧 아버지 휘 관(觀)께서 세상을 뜨셨으므로 선생께서는 관직에 나아가실 것을 미루시고, 아버지 산소에서 三년간 시묘(侍墓)를 하시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공의 마을을 효자동(孝子洞)이라 불렀다.

 

시묘를 마친 선생은 세종 十一년(一四二九)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시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編纂)하심을 시작으로,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과 경상도아사(慶尙道亞使)를 거쳐, 세종 二十三년(一四四一)에는 경창부소윤(慶昌府少尹)이 되시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와 문과시관(文科試官)도 겸임(兼任)하셨는데, 이때 왕명(王命)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頒布)를 앞둔 그 마지막 해석(解釋) 작업에도 참여하시었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세종 二十七년(一四四五)에는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로 임명(任命) 되시었으나 때마침 계모(繼母) 순천박씨(順天朴氏)께서 세상을 뜨셨으므로 “十三세 때부터 계모의 손으로 자랐으니 그 상(喪)을 정성껏 치름이 그 은혜를 갚는 길이므로 벼슬을 내어놓는다”고 상소(上疏)하시었다.

그러나 그 한 달여 후에 다시 세종(世宗)께서 좌승지(左承旨)를 보내어 간곡히 당부 하시므로 선생께서는 더 사양 할 수가 없어 임지로 부임하시었다.

 

그 후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겸지병조사(兼知兵曹事),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시었다가 문종(文宗) 즉위(卽位)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등을 이어 맡으셨는데, 이 때 병약하시던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端宗)의 보호를 고명(顧命) 받으셨다.

문종 一년(一四五一)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가셨다. 남들이 다 반대하던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하시어 큰 성과를 올리셨으므로 문종으로부터 친히 쓰신 칭찬의 글을 받으셨다.

단종(端宗)이 즉위(卽位)하신 이듬해인 단종(端宗) 一년(一四五三)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시어 다시 조정(朝廷)으로 돌아오셨다.

선생께서 함길도를 떠나시자 그곳 유림(儒林)들이 선생의 덕(德)을 기리는 생사(生祠)를 세웠으니, 도민(道民)들의 선생에 대한 추앙(推仰)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이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 영의정(領議政) 황보 인(皇甫仁)등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領議政)이 되는 정변(政變)을 일으켰고, 선생은 반수양파로 몰리었었다. 그 무렵에 함길도절제사(咸吉道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 반역(叛逆)의 난(亂)을 일으키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 난을 평정(平定)할 수 있는 사람은 함경도의 민심을 얻은 선생뿐이라 하여 선생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로 임명하였다.

선생께서 채 임지(任地)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징옥은 종성부판관(鍾城府判官) 정종(鄭鍾)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므로 임지에 도착하신 선생께서는 그 뒷수습에 전력하시는 한편, 이징옥과 연루되었던 북방(北方)의 야인(野人)들을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 하시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함길도에 계시던 단종(端宗) 三년(一四五五) 윤 六월 十一일에 영의정이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양위(讓位)라는 허울 아래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는 정변(政變)을 또 일으켰다.

이 때 함길도에서 단종 폐위(廢位)의 소식을 들으시고 쓰신 선생의 ‘방백한시(放白鷴詩)는 단종에 대한 선생의 단심(丹心)이 잘 나타나 있다.

왕이 된 세조(世祖)는 곧 선생을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문종(文宗)으로부터 단종(端宗)의 보호를 고명(顧命) 받은 바 있는 공께서는 세조를 임금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한양(漢陽)으로 돌아오시어 단종을 복위(復位)시키는 거사(擧事)를 계획하시고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시며 때를 기다리시었다.

 

세조 一년(一四五六) 四월에는 경회루(慶會樓)에서 무인(武人)들의 궁술대회(弓術大會)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선생은 문인(文人)이면서도 백발백중(百發百中)의 명궁(名弓)솜씨를 보이시어 세조(世祖)로부터 최고상(最高賞)을 받으셨다. 선생께서 문무(文武)를 고루 가추셨음을 실증(實證)한 일이라 하겠다.

마침 그 해 六월 一일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迎接)하는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선생은 이 날 현장에서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擧事)를 하기로 동지(同志)들과 결의하였다.

현장 책임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에게 맡기고, 운검(雲劒)인 성승(成勝), 박쟁(朴崝), 유응부(兪應孚)등은 세조를 베며, 선생 자신은 군(軍) 동원과 명신(明臣)들의 회유(懷柔)를 맡기로 하시었다.

그러나 당일에 돌연 운검(雲劒)을 폐(廢)하는 조치(措置)가 있었으므로 부득이 그 거사를 다음 기회(機會)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동지(同志)였던 김질(金礩)의 밀고(密告)로 모의가 탄로되어 동지들과 함께 선생께서도 체포되어 一주간(週間)의 모진 고문(拷問)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단종복위를 빙자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것이라는 자백을 강요받고 부인한 외는 홀로 끝까지 입을 다물어 불복(不服)하시고, 六월 八일에 능지처사형(陵遲處死刑)을 받으시고 순절(殉節) 하시었다. 선생은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이 불복(不服)을 ‘열(烈)중의 열(烈)’이라 하고, 이로써 죽을 사람을 많이 살렸다고 칭송(稱頌) 하였다.

이 때 선생의 맏아드님 여병재공(如甁齋公) 휘 현석(玄錫)께서도 사형(死刑) 되시었고 휘 충립(忠立) 이하 손자님들은 모두 상주(尙州) 관아(官衙)의 노비(奴婢)로 정속(定屬) 되시었으며, 공의 배위(配位)와 며느님과 따님들은 모두 고관들의 노비(奴婢)로 보내지셨다.

그러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공주 동학사(公州東鶴寺) 초혼단(招魂壇)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선생을 추모하는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조심스럽게 세워졌다.

 

선생의 고향 옥천(沃川)에는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세워지고, 영동(永同, 당시는 옥천현)의 자풍서당(資風書堂)에서는 그 선진안(先進案)을 마련하며 선생을 머리에 기록하고 극구(極口) 추앙(推仰)하였으며, 선생의 고향 마을사람들은 그 마을 어귀에 단(壇)을 쌓고 선생의 제사를 지내더니 그 마을 이름도 ‘사단동(社壇洞)’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육신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이니 그 당시 선비들의 선생에 대한 추모(追慕)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께서는 재질이 뛰어나시고, 성품이 강직(剛直)하시고 활달(豁達)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시고, 부정(不正) 비리(非理)를 용납(容納)치 않으시며, 청렴(淸廉)한 선비인데다, 언변(言辯)과 한어(漢語)에도 능(能)하신 실천력(實踐力) 있는 분이시었으니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신임을 크게 받으셨고, 세조(世祖)도 선생을 중히 쓰려고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숙종(肅宗) 二十四년(一六九八) 十一월 六일에 단종(端宗)께서 복위(復位)되시었다.

그에 힘입은 선생의 八세손이신 이휘(爾輝)공께서 숙종(肅宗) 四十三년(一七一七)에 선생의 신원(伸寃)을 호소(呼訴)하시다가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뜨시고 그의 장손(長孫)이신 정구(鼎九)공께서 이어 피 나는 노력을 하시더니 영조(英祖) 七년(一七三一)에 드디어 선생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가 내리었다.

그러자 영월(寧越) 충신단(忠臣壇)을 비롯하여 종가(宗家)에는 부조묘(不眺廟)가, 금릉(金陵)에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 고향 옥천(沃川)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시흥(始興)에는 오정각(五旌閣)이 이어 건립되고, 영동(永同, 당시는 옥천현)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배향되시는 등 공을 추모(追慕)하는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의성 덕양서원(德陽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二十여 곳에 이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正祖) 二년(一七七八)에는 공께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정조(正祖) 五년(一七八一)에는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세손이사(世孫貳師) 등의 증직(贈職)이, 정조 十五년(一七九一)에는 불천위(不遷位)가, 고종(高宗) 七년(一八七○)에는 충신 정려(忠信旌閭)의 왕명이 내리었다.

후손들이 선생을 파조(派祖)로 모신다.

 

一九七七년에 서울특별시가 노량진(鷺梁津)의 사육신(死六臣) 묘역을 정화(淨化)하여 사육신  중 거기에 묘가 없는 분의 가묘(假墓)도 봉안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선생이 세조 때 가려진 사육신이라고 판정한 一九七七년 九월 二十二일자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결의에 따라 이듬해 一九七八년 五월 十八일 사육신 묘역에 선생의 가묘(假墓)를 봉안하고, 사육신공원 의절사(義節祠)에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었다.

그리고 여기에 힘 입은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二○○四년 七월 十六일에 노량진 선생의 묘 아래에 ‘사육신김문기선생기념관’을 건립하고 백촌선조의 영정을 모시는 한편 사육신현창비를 세웠다.

 

삼가 선생의 생년(生年)을 살펴보건대 구보(舊譜)에는 생년의 기재가 없다가 一九○四년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 一三九九년생으로 기재되었으나, 미혼 때 문과(文科)급제한 사실, 소년등과(少年登科)한 사실, 순절(殉節)할 때 미혼(未婚)의 적출녀(嫡出女)가 있었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一四一一년생으로 추정(推定)되기도 한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김봉비(金奉非) 본관은 선산(善山)인데, 이조판서 문정공(吏曹判書, 文貞公) 효정(孝貞)의 따님이시고 묘는 선산(善山)에 있다고 전하나 실전(失傳)이다.

 

백촌(白村) 선조 복관작(復官爵) 송원(訟寃)

 

숙종(肅宗) 二十四년(一六九八)에 단종(端宗)께서 복위(復位)되시고,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모든 충신(忠臣)들이 착착 복관작(復官爵)되었다. 그러나 백촌 선생은 신원(伸寃)이 되지 않으므로 선생의 현손(玄孫) 휘 영시(永時)의 증손(曾孫)인 휘 이휘(爾輝) 공께서 영동 현감(縣監) 충청감사(忠淸監司)등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백촌(白村) 선조의 신원(伸寃)을 호소(呼訴) 하셨다.

그러나 몇 해가 가도록 아무런 반응(反應)이 없으므로 공은 숙종 四十三년(一七一七) 一월 十九일에 한양(漢陽)으로 올라가시어 통화문(通化門) 안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북을 쳤다.

(신문고(申聞鼓)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때는 신문고제도가 폐지됐던 때임)

그러자 놀란 의금부(義禁府) 관원들이 공에게 태형(笞刑) 三十도를 치며 문초하였다. 그러자 공은 백촌 선조의 억울함을 세세히 호소(呼訴)하시었다.

그런데 이 사안(事案) 처리를 의금부, 형조(刑曹), 병조(兵曹), 예조(禮曹) 등으로 넘기더니 나중에는 충청 감사에게로 보내어 조사케하였다.

자기 부서의 소관(所管)이 아니라거나, 백촌(白村) 선조가 병자사화(丙子士禍)때 순절(殉節)하신 증거가 없다거나, 이휘 공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들이 그 이유이다.

공께서는 각 처로 다니시며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자료로 제출하시고 일단 신원(伸寃)의 실마리를 마련하시었고, 숙종(肅宗)께서도 김감(金堪)의 예에 따라 신설(伸雪)하여 주라는 명(命)을 내리시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께서 한양(漢陽) 여사(旅舍)에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으므로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를 받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휘(爾輝) 공의 장손(長孫)이신 휘 정구(鼎九) 공께서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나서시더니 영조(英祖) 七년(一七三一)에 영조께서 궁(宮) 밖 거동(擧動)을 하는 기회를 얻어 죽음을 무릎 쓰고 꽹과리를 치시었다.

그리하여 조부 휘 이휘(爾輝)께서 호소하셨던 사실을 드시고, 백촌(白村)선조의 억울함과 그 신원(伸寃)을 호소하시었다.

그러자 영조(英祖)께서는 이 해 三월 二十六일에 백촌(白村) 선조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를 내리셨다.

 

一, 이휘공(爾輝公)의 격고송원(擊鼓訟寃)과 형조문안(刑曹文案) - 숙종四十三년(一七一七년) 역 문(譯文)

형조(刑曹)의 계목(啓目 : 계본에 붙이는 목록)은 지난 二월 七일에 병조의 계사(啓辭 : 죄를 논할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는 一월 十九일에 있었던 일인데, 충장위(忠壯衛) 김이휘(金爾輝)라는 사람이 통화문(通化門)으로부터 들어와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북을 치기에 몹시 놀라 유사(有司)로 하여금 붙들어다 죄를 다스림이 어떠합니까, 고 하였다.

왕이 윤허하였다.

그 윤허가 내렸기에 二월 十二일에 조사를 해보니, 충청도 영동(永同)에 사는 충장위 김이휘로서 나이는 六十七세인데, 지난 정월 十九일에 통화문으로 들어와 차비문 밖에서 북을 치기에 매우 놀랐습니다. 사유인즉 마지막으로 자백을 했지마는 처음에는 거역하여 사연이 나타나지 않아서, 일차로 三十도의 매를 치고, 호구(戶口)를 상고해 보니, 그의 입적(入籍)은 적실(的實)하였습니다.

이날 김이휘가 진술한 사연은 이러합니다.

“저는 망극(罔極)하게 원통한 사정은 七대조 문기(文起)에 관한 일이온 바, 도총관(都摠管) 문기(文起)는 바로 고 영의정 순(順)의 손자이고, 영의정 관(觀)의 아들로서 삼조(三朝)를 역사(歷事)하여 관위(官位)가 정경(正卿)에 이르렀습니다.

충효가 집에 전(傳)해왔고, 절의(節義)도 내력이 있었는데, 세조 二년 병자에 나라를 위해서 살신성인(殺身成仁)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사절(死節)한 육신(六臣)은(선생을 육신인줄 알지 못하고 말함) 모두 설원(雪冤)하였는데, 오직 저의 선조인 문기(文起)만이 아직 지하에서 원한을 풀지 못했으니, 자손으로서 마음 아픔이 어떠하겠습니까.

육신이 함께 살신(殺身)한 절의는 후세에 격려(激勵)가 될 것이므로 이에 조정의 대신들의 진달(進達)에 의해서 육신과 함께 죽은 三十二인을 모두 설원(雪寃)을 하여 그 절의가 현양(顯揚)되었으나, 저의 선조인 문기(文起)와 김감(金堪)은 다만 자손이 천미하기 때문에 원통한 사정이 조정에 진달(進達)되지 못하였습니다.

육신과 다 같은 사람으로서 혹은 설원(雪寃)이 되어 환하게 현양(顯揚)이 되고, 혹은 우울하게 황천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국가의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도리에서 어찌 차별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김감(金堪)은 그 내외의 후손들이 북을 치면서 소원(訴冤)함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육신(六臣)이 설원(雪寃)한 사례에 따라 그 관작(官爵)을 회복하고, 자손들이 정속(定屬)에서 벗어나고 군역(軍役)도 면제되고 몰수했던 토지도 돌려주었는데, 저의 선조 문기만은 아직 세상에 설원되지 못하여 지하에서 원통함을 안고 있으니, 식자(識者)의 통한함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열읍(列邑)의 많은 선비들이 본도(本道)에 진정을 한즉 제사(題辭 : 관청의 결정문)에 ‘이후로는 변통(變通)할 수 없다’ 하고, 또 조정에 진정을 올려도 똑같은 제사였습니다.

아! 저의 선조만 홀로 원통함을 품게 되었음은 실로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이오나, 초야(草野)의 잔손(殘孫)들이 호소할 곳도 없사옵기에, 고요한 가운데 번요(煩擾 : 번잡하고 시끄러움)하게 북을 쳐서 외람한 줄은 아오나, 원울(冤鬱)함에 격분(激奮)되어 그칠 바를 몰랐사오니, 신의 죄는 만만(萬萬)이옵니다.

다행히 바라옵건대 천일(天日)이 소명(昭明)해서 복분(覆盆 : 엎어진 항아리)의 속에까지 비추어 주시와 저의 선조로 하여금 김감의 신원의 예에 의해서 육신(六臣)과 같이 현양(顯揚)이 되게 해 주신다면 성대(聖代)의 광명한 법전(法典)이 어찌 일시적으로만 아름다웁겠습니까. 백세(百世) 뒤에도 또한 광채(光彩)가 날 것입니다.

저의 위선(爲先)하는 성심(誠心)으로서는 죽어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 략(中略)

병조(兵曹)의 계목(啓目)에는 “김이휘의 격고(擊鼓)함이 도총관 김문기가 육신과 동사(同死)한 문적이 육신전에 실려있음에 의거해서 그의 명절(名節)을 현양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하려 함인데, 김감(金堪)의 자손이 신원한 예에 의하여 같은 은전을 받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격고하는 일은 형조에서 주관하지 못하고 의금부(義禁府)로 이관하니 의금부에서 품의한 것입니다. 김문기가 육신과 동사한 충절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아직 신원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 것은 자손들이 잔미하여 호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땅히 김감과 같이 신원하도록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은전에 관한 것이니 하부에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가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계(啓)하되 “회계(回啓)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기에 김이휘의 선조 문기를 김감의 예에 의해서 관작을 회복하고, 그의 정속(定屬)된 자손이 군역과 내외자손들 가운데 노비가 된 사람이 있으면 면제하고, 몰수한 토지도 다 해제해서 일체를 돌려 줄 것을 이미 결정했습니다. 김문기의 내외자손들과 원근친척들의 소정(所定)한 군역은 의금부의 상답(上答)한 공문의 사의(辭意)에 의해서 일체를 처리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 의금부에서 이미 반포(頒布)하였은즉, 마땅히 상세히 알아서 거행하겠으며, 김문기가 이미 신설(伸雪)이 되었은즉 그 자손이 군역에 소속된 자는 자동으로 면제되는 중에 판정을 내리신대로 처사(處事)하옵는데, 그의 주거지로 이관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원 문(原文)

刑曹啓目內 今二月初七日 兵曹啓辭內 去正月十九日 忠壯衛金爾輝稱名人 自通化門 入來差備門外 擊鼓 極爲駭愕 令有司 囚禁治罪何如 傳曰允事 傳敎 是白有亦 推考次丁酉二月十二日 忠淸道永同居 忠壯衛金爾輝 年六十七 白等 去正月十九日 自通化門 入來差備門外擊鼓 極爲駭愕 情由遲晩考音良中 拒逆不著辭綠 刑問現推 校味白齊 當日金爾輝 刑問一次訊杖三十度 更推白等 戶口相考 入籍的實爲白乎旀 矣身罔極冤痛情由段 矣七代祖都摠菅文起 即故領議政順之孫 領議政觀之子 歷事 三朝 位至正卿 忠孝傳家 節義有素 乃於 景泰丙子 爲國家殺身成仁於六臣之時 同六臣 死節之人 皆己伸雪其冤而 矣先祖文起 則獨未得伸雪 地下之冤鬱 子孫之痛迫 爲如何哉 蓋六臣一時殺身之節 可以激勵乎後來 玆因 筵臣之陳達 六臣及同死三十二人 皆得伸雪其冤 而顯揚其節爲白乎矣 矣祖文起及金堪段 只綠子孫之殘微 冤枉之情 不能撤九重之天 以六臣一體之人 或爲伸雪而顯揚於明時 或爲幽欝而飮泣於泉下 其在一視之道 寧爲厚薄於其問耶 金堪則因其內外孫之擊鼓訴冤 自朝家依六臣雪冤之例 復其官爵 脫其定屬 子孫軍保 皆爲頉免 籍沒田民 一並出給爲白乎矣 矣祖文起 則尙未得伸雪於世 而抱冤於地下 識者之痛惋久矣 列邑多士 呈書于本道 則題以自下 不可變通云 又呈于廟堂 則亦題以自下不可變通云 嗚呼 矣祖獨抱之冤 實是百世之公議 而草野殘孫 伸訴無地 靜拶之中 煩擾擊鼓 極知猥越 而冤欝所激 不知裁止 臣罪又萬萬矣 幸望 天日之明照 臨於覆盆之中 使矣祖 得比於金堪伸雪之例仍與六臣同歸於顯揚之地 則聖代光明之典 豈獨專美於一時 百世之後 亦可以垂裕矣 在矣身爲先之誠 死無憾焉

중 략(中 略)

兵曹啓目 金爾輝擊鼓 據都摠管金文起與六臣同死文蹟 載於六臣傳 而其顯揚名節 昭著於世 是白乎等以 依金堪子孫 伸雪例一體蒙 恩事 至於擊鼓 則自刑曹 不得主菅 移于禁府 自禁府禀處爲白有矣 金文起之同死於六臣之節 旣如是明白 而尙未蒙伸雪之典者 蓋出於子孫之孱微 不能呼冤之所致 當與金堪一體伸理 是白乎矣 事繫 恩典 自下不敢擅 便上裁何如 啓依回啓施行 爲良如敎敎是置 金爾輝先祖文起依金堪例 復其官爵 脫其定屬 子孫軍保及內外子孫爲奴婢者 皆爲頉免 籍沒田民 一倂出給事 旣己定奪 爲白有如乎 金文起內外子孫 遠近族屬 所定軍役 義禁府覆啓辭意 一倂頉下事 蒙 允後 自禁府 旣己頒布 則事當知委擧行 是白去乎 金文起旣己伸理 則其子孫之定屬軍保者 自在頉免之中 依判下 頉下之意 所居官良中 行移何如 傳曰 允

 

二, 정구(鼎九)공의 격쟁 상언(擊錚上言)과 복관작(復官爵) 이조등록(吏曹謄錄)

一七三一년(英祖 辛亥) 三월에 선생의 十세손 정구(鼎九)가 꽹과리를 쳐서 임금께 상언하여 복관작(復官爵)의 왕은(王恩)을 입어 신설(伸雪)되니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라 한다.

英祖辛亥十世孫鼎九 又爲上言 乃蒙伸雪之 恩 復官爵 資憲大夫吏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吏曹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