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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 김녕 연혁(金寧沿革)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誌)에 따르면 김녕(金寧 : 지금 金海)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十八년(四一)에 수로왕(首露王)이 九촌장(村長)의 추대(推戴)로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뒤, 가야(伽倻) 금관국(金官國)등으로 국호(國號)가 바뀌었다가, 신라 법흥왕(法興王) 十九년(五三二)에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부강(附降)하여 빈객(賓客)으로 예우(禮遇) 받은 뒤,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정하고 읍호(邑號)를 금관군(金官郡)으로 변경하였다.

그 뒤 문무왕(文武王) 二十년(六八○)애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고치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二十三년(九四○)에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치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음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시키었다.

성종(成宗) 十四년(九九五)에는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하였다가 현종(顯宗) 三년(一○一二)에 금주군(金州郡)으로 고치었다.

그 뒤 원종(元宗) 十一년(一二七○)에는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충렬왕(忠烈王) 十九년(一二九三 : 동국여지승람에는 충렬왕 二년으로)에 다시 현(縣)으로 낮추었고, 충렬왕 三十四년(一三○八)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다 충선왕(忠宣王) 二년(一三一○)에 다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김녕(金寧)의 읍호 변천

 

가락(駕洛) ----------------------------      四一년

가야(伽倻) ----------------------------      四一년

금관(金官) ----------------------------   五三二년

임해(臨海) ----------------------------    九四○년

금주(金州) ----------------------------    九九五년

김녕(金寧) ---------------------------- 一二七○년

금주안동(金州安東) 분성(盆城 : 별호) ------ 一二九三년

김해(金海) ---------------------------- 一三一○년

고려사지리지, 동국여지승람김해편(高麗史地理誌, 東國與地勝覽金海篇)

 

 

 二, 예조비준서(禮曹批准書) 一

 

충청도 연기(忠淸道 燕岐)고을 유학(幼學) 김주성(金周聲) 근학(根學) 성현(成鉉) 치수(致秀) 홍환(鴻煥) 등은 삼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대종백(大宗伯 : 예조판서)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데, 생등(生等)이 관향(貫鄕)을 김해(金海)로 한 것은 경순왕(敬順王) 十一세손(八세손 착오)이신 김녕군 휘 시흥(金寧君 諱 時興)께서 김해(金海)땅에 봉군(封君)받으셨기 때문에 호(號)를 김녕(金寧)으로 하였으니, 김녕(金寧)은 김해(金海)입니다.

김녕군(金寧君)의 九세손(八세손은 착오)이신 충의공 휘 문기 호 백촌(忠毅公 諱 文起 號 白村)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께서는 단종(端宗)때 육신(六臣)과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므로 (당시는 백촌선조가 사육신인 줄 몰랐을 때임) 자손들이 침체(沈滯)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무술(戊戌∥一八三八년)에 우리 증조부(曾祖父)이신 휘 홍련(弘鍊)께서 상소(上疏)하여 원통(寃痛)함을 하소연 하심에,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는 은전(恩典)을 내리어 충의(忠毅)의 시호(諡號)와 찬성(贊成)의 증직(贈職)을 주시고, 판부(判付:신하가 건의한 안건을 허락함)의 교지(敎旨)를 내리었습니다.

김충의 문기(金忠毅 文起)의 탁월(卓越)하신 대절(大節)은 六신(臣)과 함께 죽음을 아름답게 하셨으니, 일후(日後)부터 자손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천지서(賤至庶)에게 천역(賤役)을 시키지 말라는 왕명이 내린뒤, 김해(金海)의 김(金)은 선김 후김(先金後金) 구별(區別)이 없이 경순왕(敬順王) 후손(後孫)이라 일컬어 왔으니, 김녕군(金寧君)을 시조(始祖)로 삼았던 것이 혼잡(混雜)함이 심하였습니다.

대체로 선김(先金)은 가락(駕洛) 후손이요, 후김(後金)은 김녕군(金寧君) 후손이라, 한번 판부(判付)의 교지(敎旨)가 내린뒤부터 천역(賤役)을 모피(謀避)하는 사람들이 거짓으로 사사로이 김녕군(金寧君) 후손이라 칭탁하여 백촌(白村)으로 파조(派祖)를 삼았습니다.

우리들은 불초(不肖) 잔약(孱弱)한 자손으로서 이제 바야흐로 족보를 편찬하오니, 훗날 서거일 염려가 없지않아, 이제 감히 대략의 전말(顚末)을 진술하고 우러러 합하(閤下)께 하소연 하오니, 엎드려 빌건데 세세히 통찰하시어 김녕군(金寧君) 자손으로 하여금 김녕(金寧)으로 관향(貫鄕)을 갖게하여 파보(派譜)를 바로 잡고, 선김(先金)이 거짓 칭탁하여 백촌(白村)의 사손(嗣孫)을 등록하는 폐단(弊端)을 가려 주시기를 천만 간곡(懇曲)히 대종백 합하(大宗佰 閤下)의 처분(處分)을 기다립니다.

기유(己酉:一八四九년) 十一월

경상도 유학(慶尙道 幼學) 김치수(金致秀)

김주성(金周聲)

김낙희(金洛凞)

김원성(金源聲)

김호성(金浩聲)

김치범(金致範)

강원도 진사(江原道 進士) 김서범(金書範)

종중(宗中)에서 상의하여 선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라. 二十九 ㊞

 

忠淸道燕岐縣幼學金周聲根學成鉉致秀鴻煥等謹齊沐上書于

大宗伯閤下伏以生等姓貫金海敬順王八世孫金寧君諱時興封君於金海而因號金寧則金寧爲金海古號也自金寧君之八世孫忠毅公諱文起號白村官吏曹判書端廟朝與六臣同日殉節而子孫沈滯矣越在戊戌生之曾祖弘諫上章鳴寃洪惟我正廟朝如天涵育之澤 賜謚忠毅 贈職贊成判付下敎內金忠毅文起之卓越大節與六臣匹美日後子孫勿論公私賤支庶勿侵賤役批旨判下後金海之金無先金後金之別而皆稱敬順王後裔而以金寧君爲始祖混雜無常盖先金則駕洛後裔而後金則金寧君後孫也一自判自之後謀避賤役者僞錄私託於金寧後孫而以白村爲祖-中略-生等以不肖孱劣之孫今方修譜而不無日後混雜之慮故玆敢略陳顚末偎是仰籲於閤下伏乞 細細垂察敎是後金寧君子孫以金寧爲姓貫以正派以譜別先金詐托僞錄之弊千萬祈懇之至大宗伯閤下處分

己酉 十一月 日

慶尙道幼學 金致秀

金洛絳

金周聲

金源聲

金浩聲

自宗中詳議善處宜當向事二十九 ㊞

 

 

 三, 예조비준서(禮曹批准書) 二

 

예조(禮曹)에 단자(單子)를 올려 영남(嶺南)과 호남 유생(湖南儒生)  김기대(金基大) 영규(永奎) 한봉(漢鳳)등은, 삼가 대종백(大宗伯:禮曹判書) 합하(閤下)께 백배상서(百拜上書)하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김씨(金氏)의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한 성씨(姓氏)가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가락왕(駕洛王) 휘 수로(首露)의 후손이며, 또 하나는 신라 시조왕(新羅始祖王) 휘 알지(閼智)의 三十八세손(三十세는 착오)이신 휘 시흥(時興)께서 고려(高麗)때 나라에 공(功)을 세우시어 김녕군(金寧君)을 봉군(封君)받으신 후, 그 자손들은 지금까지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써 왔기에 세상에서는 선후김해(先後金海)로 구별(區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오면서 여러 대를 거친 두 김(金)씨의 후손은 그 수가 헤아릴수 없이 많은데다,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태반은 미약(微弱)하였던 것입니다.

선김(先金)의 후손은 후김(後金)의 본관(本貫)을 알지 못하였고, 후김(後金)의 후손은 후김(後金)의 본관(本貫)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타성이 분별(分別)못함이야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근본을 연구함에 있어, 애태웠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김녕(金寧)은 즉 김해(金海)의 고호(古號)이니, 김녕군(金寧君)의 후손은 보첩(譜牒)을 수정(修正)할 때 반드시 관조(貫祖)께서 봉군(封君)받으신 것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면 지나친 실책(失策)이 없었을 것인데, 일의 체계(體系)가 중(重)한데도 사사로이 자기 나름대로 한데다가 지극히 소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평소에 비록 미약했다 하더라도, 중시(衆視)를 무릅쓰고 먼 천리길을 선조의 사실목록(事實目錄)에다 단자(單子)를 첨부하여 진정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선후 김(先後金)이 이조 일관(異祖一貫∥조상은 다른데도 본관이 같음)한 사실을 깊이 살피시어 현란(眩亂)의 폐단이 없게 하여주시며, 특히 관향(貫鄕)을 고호(古號)인 김녕(金寧)으로 대종백 합하(大宗伯 閤下)께서 선처하심을 바라옵니다.

갑신(甲申:一八八四)년 十二월 十七일

선후 김(先後金)이 두 김해(金海)로 혼잡되었으나, 김녕군(金寧君)의 후손은 김녕(金寧)으로 수보(修譜)하는 것이 도리상(道理上) 마땅한 일이다.

예조 답인(禮曹 踏印)

 

禮曹呈單 嶺湖儒生金基大永奎漢鳳, 謹百拜上書于

大宗伯閤下伏以金氏之貫金海者有二一則駕洛王諱首露也一則新羅始祖王諱閼智三十五世孫諱時興即高麗朝以功封金寧君也其後子孫以今金海爲貫焉世以先後金海別之然挽近屢世二金之後裔其數不億㪚在各處太半微劣先金之孫不知爲先金之爲貫後金之孫不知爲後金之爲貫而况他姓之蔑識者乎生等究其本源常切摧腹裂心者此也金寧即金海古號即金寧君後裔修正譜牒必以貫祖受封金寧爲貫似無涉越之責而事係體重從私擅便極爲徐忽故生等 雖殘劣敢冒衆視裹足千里世祖事實目錄單子粘後齊聲仰龥伏乞按禮令明極察先後金異祖一貫眩亂之弊 特使仍貫古號金寧之地千萬望良

大宗伯 閤下 處分

甲申十二月十七日

題音 先後金之 混雜二金海之所然金寧君之 後裔以金寧修譜事理宜當向事

禮曹 踏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