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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편 결핵 퇴치운동의 선구자 병서(秉瑞)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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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410회 작성일 11-05-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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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忠毅公) 휘(諱) 문기(文起)의 十八세손이신 약산(藥山) 병서(秉瑞)공은 一八九三년 一월 十五일 평북 영변군 독산면 화죽동 김촌(平北 寧邊郡 獨山面 花竹洞 金村)에서 아버님 정학(正鶴)공과 어머님 김성덕(金聖德, 본 광산) 사이에 출생(出生)하시어, 一九七六년 六월 二十五일 향년(享年) 八十四세로 타계(他界)하신 분으로, 세상(世上)에서는 「한국(韓國)의 슈바이쳐」라고 칭송(稱頌)하고 있다. 선생(先生)의 아버지 정학(正鶴)공께서는 심약(審藥, 醫務局長)이라는 벼슬을 지내신 한방의사(漢方醫師)이셨는데, 一八八七년 우리나라에 흑사병(黑死病)이 만연(蔓延)되었을 때 이를 퇴치(退治)하는데 공(功)을 세우신 분이시다. 선생(先生)께서는 一九一三년 영변(寧邊)의 사립유신학교(私立維新學校)를 졸업(卒業)하시고, 그 해 해주(海州)로 가시어 미국선교사(美國宣敎師) 누우턴 박사(博士)에게서 영어(英語)와 독어(獨語)를 배우셨는데, 누우턴 박사가 영변(寧邊)에 있을 때 선생(先生)을 기특(奇特)하게 생각하고 해주(海州)로 데려 갔던 것이다.

한편 선생(先生)께서는 누우턴 박사가 설립(設立)한 해주(海州) 구세병원(救世病院)에서 근무(勤務)하게 되셨는데, 그것을 계기(契機)로 一九一七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입학(入學)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先生)께서는 一九一九년 三·一운동(運動)에 가담(加擔)하셨던 탓으로 세브란스 의학(醫學)을 부득이 중퇴(中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三十三인의 한 분인 해주출신(海州出身) 박희도(朴熙道)선생과 함께, 三·一운동의 사전계획(事前計劃)에 참여(參與)하셨던 일과 또 정재용(鄭在鎔)선생과 함께 독립운동(獨立運動) 최전선(最前線)에서 활약(活躍)하셨다는 사유(事由) 때문이었다. 一九一九년 三월 一일 파고다공원(公園)에서 「한 무명청년(無名靑年)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朗讀)했다.」는 그 무명청년(無名靑年)이 바로 정재용(鄭在鎔)선생이었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한 선생(先生)이 바로 약산선생(藥山先生)이셨다. 약산선생과 정재용선생은 해주 구세병원(海州 救世病院)에서 함께 근무(勤務)하시던 동료 간(同僚 間)이었는데, 三·一운동 사전계획(事前計劃) 때도 두 분은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밀송(密送)하는 책임(責任)을 맡아 작업(作業)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정재용선생은 원산교회(元山敎會)로 밀송(密送)하는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 꾸러미를 꾸리다가 한 장을 무심(無心)코 호주머니 속에 넣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파고다공원에서 낭독(朗讀)한 독립선언(獨立宣言)의 원장(原帳)이었다. 三十三의 선발대(先發隊)로 파견(派遣)되어 미리 파고다공원에 가 있었다.

이 때 정재용선생은 표범처럼 날쌔게 정자(亭子) 위로 뛰어 올라가 호주머니에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꺼내어 들고 낭독(朗讀)하기 시작(始作)한 것이다.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이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혼란(混亂)을 이루었던 광장(廣場)인지라, 더 낭독(朗讀)할 수가 없었다. 다만 정재용선생 가까이 있던 사람들만이 이를 경청(傾聽)하는 듯하였다. 이 때 약산선생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소리 높이 외치셨다.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는 연쇄반응(連瑣反應)을 일으켜 삽시간에 만세(萬歲)소리가 파고다공원을 뒤엎고 말았다. 정재용선생은 삼일로(三一路) 방면(方面), 약산선생은 종로 보신각(鍾路 普信閣) 방면(方面)으로 선두행진(先頭行進)을 하셨다. 그러나 두 분이 일본헌병(日本憲兵)에게 붙잡혀 옥고(獄苦)를 치루셨는데, 약산선생은 一년 동안 옥(獄)살이를 하셨다. 옥문을 나오신 약산선생은 재출발(再出發)을 다짐하시고, 一九二○년에 조선약학전문학교(朝鮮藥學專門學校)에 입학(入學)하시어 一九二四년에 졸업(卒業)하신 뒤 약사(藥師)가 되셨는데, 또 의사시험(醫師試驗)에 합격(合格)하시어 의사(醫師)가 되셨고, 같은 해에 감리교회(監理敎會)의 장로(長老)도 되셨다. 선생(先生)께서는 대망(大望)을 살리기 위해 일본(日本)으로 건너가시어 一년간 폐결핵요양소(肺結核療養所)를 시찰(視察)하셨다. 그것은 선생(先生)의 평생소원(平生所願)인 폐결핵요양소(肺結核療養所)를 설립(設立)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歸國)하신 뒤 요양소(療養所)를 설립(設立)하려고 하실 때 해주(海州) 구세병원장(救世病院長)으로 새로 부임(赴任)한 홀박사(博士)가 뇌병원(腦病院)을 설립(設立)하려는 것을 알게 되셨다. 선생(先生)께서는 박사를 설득(說得)하여 一九二八년에 해주(海州) 구세요양원(救世療養院)을 합동(合同)으로 설립(設立)하시고, 한인원장(韓人院長)이 되셨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요양소(療養所)이었다. 환자(患者)들을 대(對)하는 선생(先生)의 모습은 성자(聖者)와도 같았으니, 환자(患者)들의 괴로움을 자신(自身)의 괴로움으로 알고 성(誠)과 열(熱)을 다 하셨다. 선생(先生)의 저서(著書)로는 「요양복음(療養福音)」「요양지침(療養指針)」「식이요법(食餌療法)」「인공기흉요법(人工氣胸療法)」 등이 있다.

一九三○년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크리스마스 씰을 창안(創案)하여 적십자운동(赤十字運動)을 전개(展開)하셨다. 그러나 대중(大衆)은 이 크리스마스 씰을 우표(郵票)로 사용(使用)했기 때문에, 선생(先生)은 공연(空然)한 혐의(嫌疑)를 받고 경찰(警察)에 여러 번 불려 다니기까지 하셨다.

또한 선생(先生)은 일제(日帝) 때 요양원(療養院)을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사상가(思想家)들의 은신처(隱身處)로도 이용(利用)하셨다. 그래서 많은 애국자(愛國者)들이 요양원(療養院)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천도교본부(天道敎本部) 총무(總務) 김기전(金起田)선생 같은 이는 四년간이나 입원(入院)하고 있었다. 일본경찰(日本警察)의 고등계형사(高等係刑事)들이 四년 동안 병실(病室) 밖을 감시(監視)하였고, 약사선생은 무시(無時)로 수사(搜査)하였다고 한다.

그 때 선생(先生)의 괴로움은 형언(形言)하기 어려웠으나 끝내 민족적(民族的)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으셨으니, 이는 백촌선조(白村先祖) 충의공(忠毅公)의 유덕(遺德)의 힘이었으리라. 八·一五해방(解放) 후(後) 조만식(曺晩植)선생이 이북오도협회(以北五道協會)를 조직(組織)하고 十五인위원회(十五人委員會)를 구성(構成)할 때 약산선생을 위원(委員)으로 정(定)하고, 보건부장(保健部長, 保健社會部長官)에 임명(任命)한 것은 선생(先生)의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지성(至誠)을 간파(看破)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구세요양원(救世療養院)에서의 업적(業績)을 높이 평가(評價)했기 때문이었으리라, 八·一五해방 후에 삼팔선(三·八線) 이남(以南)인 연백군 천태(延白郡 天台)에 황해의원(黃海醫院)을 개설(開設)하고 가난한 농민(農民)들의 보건사업(保健事業)에 힘을 기울이셨다. 한편 탁아소(托兒所)와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를 세워 불우(不遇)한 소년(少年)들을 배움의 길로 터주기도 하셨던 것이다. 또한 연백군 백천(延白郡 白川)에는 복음농민고등학교(福音農民高等學校)를 設立하여 이 地方의 교육사업(敎育事業)에도 힘쓰셨다. 六·二五 때는 대구 피난민회장(大邱 避難民會長)으로 난민보호(亂民保護)에도 크게 이바지 하시는 한편, 대구 삼덕동(大邱 三德洞)에 감리교 동덕교회(監理敎 東德敎會) 및 유치원(幼穉園) 설립(設立)에도 이바지 하셨다.

선생(先生)께서는 만년(晩年)에 더욱 깨달은 바 있어 一九六○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京畿道 楊平郡 西宗面)에 성심의원(誠心醫院)을 개설(開設)하시고, 七十五세에 이르시기까지 하루 평균(平均) 백리길을 다니시면서도 피로(疲勞)하시는 빛이 없이 언제나 기쁜 얼굴로 대(對)하시면서 무료시술(無料施術)을 하셨으니, 인간(人間) 약산선생(藥山先生)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 주신 것이라 하겠다.

방송국에서는 선생의 생활(生活)을 현지(現地)에서 취재(取材)하여 제二十七회 「양지(陽地)의 마을」에서 「한국(韓國)의 슈바이쳐」라고 극찬(極讚)하여 녹화방송(錄畵放送)까지 하였으나, 「한국(韓國)의 슈바이쳐」가 아니라 「세계(世界)의 약산선생(藥山先生)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妥當)하다고 세인(世人)들은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는 전 재산(全 財産)인 임야(林野) 一만八천여 평을 개척교회(開拓敎會) 설립(設立)을 위하여 바치시기도 하셨다.

선생(先生)께서는 「나의 八十평생 전 재산은 임야 一만八천 평뿐인데 그 것을 모두 교회(敎會)에 바치고, 자손(子孫)들에게는 나의 정성(精誠)을 물려줄 뿐이라.」고 술회(述懷)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거룩한 정신(精神)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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