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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편 걸인을 구제한 종성(鍾聲)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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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418회 작성일 11-05-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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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자(字)는 옥여(玉汝)이니, 충의공(忠毅公)의 十三세손인 치갑(致甲)공의 외아드님으로 一八六一년(哲宗十二, 辛酉)에 경북 영양군 청기면 나방촌(羅方村)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품(氣稟)이 관후심중(寬厚沈重)하시고 인자하셨으며 원만하셨다. 九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님 치갑(致甲)공을 여으시고, 성격이 엄격하시고 근엄하신 어머님 최씨(崔氏)부인의 뜻에 따라 가장으로서의 자질을 닦으시고, 소고 조진용(小皐 趙珙容)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시면서 시경(詩經, 詩書와 經書)과 사서(史書)를 깊이 연구하셨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나시었다.

공은 一八八二(고종九, 壬午)에 과거(文科考試)를 치르려고 상경(上京)하시어 응시하셨다가 뜻하지 않은 안질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귀향하셨다. 그 뒤 공은 지극한 효도로서 어머님을 봉양하셨으며, 가사를 처리하심에 있어서 반드시 어머님께 상의하시면서 어머님의 뜻을 어기지 않으셨고, 근검절제하면서도 가난한 친척이나 향리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또 선조를 위하는 위선사업(爲先事業)에도 힘쓰셨으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는 제위토(祭位土)를 사들이고 재사(齋舍)를 짓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공은 자손 교육에도 힘쓰셨으니, 특히 손자 재권(在權)공을 경북고보에 유학시켜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닦게 하셨으며 증손자인 형팔(炯八)공은 一九七○~八○년대 대동보 사무국장, 전국종친회 이사, 백촌선생실기(白村先生實記) 편찬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동보의 편찬, 백촌 김문기선생 현창사업 등 우리 문중의 훌륭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공(公)은 과객이나 집 없는 걸인이 찾아들면 수일 혹은 몇 달씩이나 유숙시키면서 식사와 주효(酒肴)로써 대접하니 식객이 끊이지 않았고, 사랑방에는 학문을 토론하려 찾아드는 선비, 시국을 걱정하는 우국지사(憂國之士), 가사(家事)에 구원을 청하려 찾아드는 빈객(賓客)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명성이 인근군(隣近郡)에 까지 널리 알려져 공의 후덕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公)은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의 벼슬을 하시면서 훌륭한 필재(筆才)와 원만관후(圓滿寬厚)한 성격과 불운역경(不運逆境)의 인사들을 구제(救濟)하기 위해 힘썼던 관후인자(寬厚仁慈)한 그 기품 때문에 당세인(當世人)들이 김감찰노인(金監察老人)이라고 불렀다. 一九三○년(庚午) 一월 十五일에 선종(善終)하시니 향년 七十세이시며 장례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공(公)의 넋을 달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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