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행편 빈민을 도운 현진(顯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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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364회 작성일 11-05-13 09:13본문
공(公)의 초휘(初諱)는 현삼(顯三)이고 자(字)는 사문(思文) 호(號)는 월헌(月軒)이시니, 충의공(忠毅公) 휘(諱) 문기(文起)의 十四세손으로 임오(壬午) 六월 二十五일 출생(出生)하셨다. 천성(天性)이 인후(仁厚)하시어 어릴 때부터 남에게 주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성장(成長)하셔서는 고을 사람들이 애경사(哀慶事)를 당(當)하면 한집도 빠짐없이 부조(賻助)하시면서 상(喪)을 당한 사람이 장비(葬費)가 없어 장사(葬事)를 못할 사람에겐 장비(葬費)를 주어 장사(葬事)를 하게하고 가난하여 혼비(婚費)가 없어 혼인(婚姻)을 못한 사람에겐 혼비(婚費)를 주어 혼인(婚姻)을 하게하며, 의복(衣服)이 없는 사람에겐 의복(衣服)을 주고 식량(食糧)이 없는 사람에겐 식량(食糧)을 주셨다. 또 먼 곳에서 일가나 손님들이 찾아오면 며칠 동안 묵게 하면서 후히 대접(待接)하고 여비(旅費)까지 주어 보내셨다. 그리고 익산군 춘포면 인수리(益山郡 春浦面 仁壽里)에 거주(居住) 당시(當時) 무자(戊子), 기축(己丑) 양년(兩年)에 흉년(凶年)이 들어 주민(住民)들이 기사경(饑死境)에 이르자 창고(倉庫)를 열어 빈민(貧民)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기민구호(飢民救護)에 전력(全力)을 다 하셨다. 그러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은덕(恩德)을 기리어 송덕비(頌德碑)를 세우자는 논의(論議)가 있었으나 시운(時運)이 부제(不齊)하여 파의(罷議)되고, 지금까지 구전(口傳)해 온다. 一八八○년 十一월 六일 자택별세(自宅別世)하시니,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계동(益山郡 驪山面 源水里 眞系洞) 임좌(壬坐)에 안장(安葬)되시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을 증직(贈職)받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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