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편 중시조(中始祖) 경순대왕(敬順大王) 휘 부(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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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796회 작성일 10-01-11 10:49본문
경순대왕 영정(敬順大王影幀) 숭혜전에 모셔 있다.
경순대왕릉(敬順大王陵)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경순대왕(敬順大王 : 신라 제56대왕, 927~935) 우리 김녕김씨의 직계 선조로서는 여섯 번째로 왕위에 오르셨다.
경천묘(敬天廟)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적량면 중리리 경순대왕의 영정을 모셨다.
경순대왕 비각(碑閣) 소재지 : 경주시 황남동 七一六(숭혜전 앞) 경순대왕의 계보와 행장을 기재한 비의 비각이다.
숭혜전(崇惠殿) 소재지 : 경주시 황남동 二六 미추대왕, 문무대왕, 경순대왕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는 경순대왕(敬順大王)만 모셔왔으나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부터 미추왕(味鄒王 : 13대,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름)과 문무왕(文武王 : 30대, 삼국통일을 이룸)을 함께 모셨다.
대왕은 시조(始祖) 휘 알지(閼智)의 四十六대손 문성왕(文聖王)의 현손(玄孫)이신 신흥왕(神興王 : 추존) 휘 효종(孝宗)이 아드님으로 신라(新羅) 五十二대 효공왕(孝恭王) 一년(八九七)에 탄생하시어 五十五대 경애왕(景哀王 : 朴氏) 四년(九二七) 十一월에 이종(姨從)이신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五十六대 왕위(王位)에 오르셨으니 우리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직계 선조로서는 여섯 번 째로 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왕위에 오른 대왕께서는 왕 三년(九二九) 七월 견훤의 경북 의성(義城) 공격을 받고, 十월에는 문경(聞慶) 공격을 받았으므로 이를 격퇴 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한편 대왕 五년(九三一) 二월에는 고려 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군사 五十여기를 이끌고 경주에 이르러 왕을 배알(拜謁) 할 것을 원하므로 왕께서는 백관(百官)을 거느리시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이를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세(國勢)는 날로 기울어 가므로 대왕 六년(九三二)에는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응원(應援)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九년(九三五) 十월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더 이상 지탱해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께서는 천명(天命)을 깨달으시고 군신회의(君臣會議)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양도 할 것을 제의하셨다. 찬반(贊反)이 분분한 가운데 특히 태자(太子) 일(鎰 : 麻衣太子)은 『스스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이를 의론함이 옳은 일이 온데, 어지 천년 사직(千年社稷)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주겠습니까?』하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이 이상 피를 흘리게 함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신 뒤 국서(國書 : 임금의 편지)를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신라국을 양도(讓渡)할 뜻을 전하시었다. 그러자 태자 일(鎰)은 개골산(皆骨山 : 金剛山)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으며, 초식(草食)으로 애달픈 일생을 마치시었다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고려 태조는 교외에까지 나가서 대왕 일행을 맞이하고, 태조의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대왕의 후비(后妃)로 삼았다. 대왕은 고려 경종 三년(九七八) 四월에 한(恨)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향수(享壽)가 八二세이시고, 시호(諡號)는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漣川郡百鶴面高浪浦里)에 있고, 선비(先妃)는 죽방왕후 박씨(竹房王后朴氏)이고, 후비(后妃)는 효목왕후 왕씨(孝穆王后王氏)로 낙랑공주(樂浪公主)이나 후에 신란공주(新鸞公主)라 개호(改號)하셨으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제一공주이시다. 또 별비(別妃)로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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